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일 슈퍼게임 (문단 편집) === 1991년 === '''엔트리'''[* 해태: 7명, 빙그레: 4명, 삼성: 3명, 롯데: 5명, 태평양: 2명, 쌍방울: 2명, LG, OB 각각 1명, 코칭스태프 제외 총 25명의 선수가 1991년 대회에 참가하였다.] * 감독 : [[김응용]](해태) * 코치 : [[김성근]](삼성), [[강병철]](롯데), [[김인식]](쌍방울) * 투수 : [[선동열]], [[이강철]] (이상 해태), [[한용덕]], [[송진우(야구)|송진우]] (이상 빙그레), [[윤학길]], [[박동희(야구선수)|박동희]](이상 롯데), [[최창호(야구선수)|최창호]], [[정명원]](이상 태평양), [[김용수]](LG), [[조규제]](쌍방울) * 포수 : [[장채근]](해태), [[이만수]](삼성) * 내야수 : [[김성한]], [[한대화]](이상 해태), [[류중일]], [[김용국(야구)|김용국]](이상 삼성), [[김민호(1961)|김민호]], [[박정태]](이상 롯데) * 외야수 : [[이순철]], [[이호성]](이상 해태), [[이정훈(1963)|이정훈]](빙그레), [[장효조]](롯데), [[김형석(야구)|김형석]](OB) * 지명타자 : [[장종훈]](빙그레), [[김기태(1969)|김기태]](쌍방울) ||[[파일:/image/295/2013/11/20/143043101_%25C7%25D1%25C0%25CF-%25BD%25B4%25C6%25DB%25B0%25D4%25C0%25D3-%25B1%25E8%25BC%25BA%25C7%25D1.jpg]]|| ||1차전, [[이라부 히데키]]의 공을 홈런으로 만들어낸 [[김성한]]|| [youtube(4hH4_XOTRQ0)] [[1991년]] 한일 슈퍼게임 [[일본]] 측 중계방송. [[장훈(야구선수)|장훈]](하리모토 이사오) 씨가 해설하고 있다. 일본 투수인 [[사사오카 신지]]([[히로시마 도요 카프]])는 [[1991년]] [[사와무라상]] 수상자. 1991년 기준으로 한국 프로야구는 출범한지 불과 10년째였고, 당시 55년의 전통을 자랑했던 일본 프로야구와의 [[KBO 리그/리그 레벨차 논쟁|실력 격차가 지금보다 훨씬 컸다]]. 때문에 최초의 한일 슈퍼게임을 앞두고서는 '''1승이라도 하면 대단한 거다''' 라는 평가가 중론이었을 정도. 당시 경기에 참여한 타자들도 '''일본 [[투수]]들이 작정하고 던지면 컨택도 힘들다'''고 토로했을 정도였다. [[이정훈(1963)|이정훈]], [[김성한]], [[한대화]], [[장종훈]] 등 당대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선수들의 평이 이 정도였으니, 이 시절 한일 프로야구간 격차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. 특히 일본 투수의 정교한 변화구(주로 [[포크볼]])에 맥없이 [[삼진(야구)|삼진]]을 당하기 일쑤였다. 이 슈퍼게임의 영향으로 한국 투수들도 포크볼을 본격적으로 던지기 시작하고, [[재일교포]]가 아닌 순수 일본계 코치들이 프로야구에 등장한다.[* 1992년에 [[도이 마사히로]]가 [[삼성 라이온즈]] 타격코치로 활동했다.] 그리고 양팀 선발포수였던 [[후루타 아츠야]]와 [[이만수]]의 도루저지송구도 큰 차이가 있었는데 후루타의 송구는 빠르고 빨랫줄처럼 날아가며 한국 주자들을 저격했던 반면 이만수의 송구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. 한국대표는 프로야구 올스타팀이었지만, 일본은 경기마다 선수 구성에 약간 차이를 두었다. 1991년 [[도쿄돔]]에서 열린 1,2차전은 일본도 올스타 팀이었고, 이들 두 경기에서 한국 올스타는 2~3점만 겨우 득점하며, 8점을 득점한 일본 올스타에게 크게 패했다. 하지만 지방구장을 돌면서 열린 3,4,5,6차전[* 3차전은 [[고시엔 구장]], 4차전은 [[후지이데라 구장]], 5차전은 [[기후 현]] 나가라와구장, 6차전은 [[나고야 구장]]에서 개최]에서 일본팀은 해당 구장의 홈팀을 주축으로 다른 팀 주전을 몇명 끼워넣는 구성이었던 것이다. 일본 [[선발 투수|선발]]로 10승도 하지 못한 [[투수]]가 나오기도 했고, 이런 경기에서 2승을 거두었다. 이 당시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의 투수였던 [[선동열]](해태)이 대회 직전 발목부상을 입어 조기 투입이 곤란해졌다. 그 탓에 1차전에선 당대 최고의 강속구 투수로 명성을 날렸던 [[박동희(야구선수)|박동희]](롯데)가 선발로 나섰다. 한일 프로야구의 첫 공식 대결로 기록된 이 경기에서 한국팀은 장단 14안타를 맞으며 3-8로 패했다. 선발 박동희가 7피안타를 맞으면서도 4이닝 3실점으로 비교적 호투했지만, 5회에 교체 투입된 그해 구원왕 [[조규제]](쌍방울)가 처음 두 타자를 잘 처리한 후 3번 [[아키야마 코지]](세이부), 4번 [[오치아이 히로미츠]](주니치)에게 연속으로 홈런을 맞으면서 경기 흐름이 완전히 기울었다. 이후 한국 올스타는 해태 [[김성한]]이 훗날 메이저리그로 진출 하였으며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강속구 투수이던 [[이라부 히데키]](롯데)를 상대로, 8회에 3점째 만회점을 올리는 홈런을 기록했다.[* 김성한은 이후에도 슈퍼게임 경기 동안 3 홈런을 쏘아 올리며 한국 올스타의 타자로서는 꾸준히 활약했고, 당시 사용했던 배트가 도쿄돔 야구박물관에 전시되는 영예도 누렸다.] 2차전은 롯데 [[윤학길]]이 선발로 나섰으나 3이닝도 못 버티고 4실점으로 두들겨맞는 등 1차전보다도 더 실력차를 드러내며 2-8로 완패를 당했다. 3차전은 빙그레 [[송진우(야구)|송진우]]가 선발로 나서 6이닝동안 무실점 호투, 이정훈과 김성한의 홈런에 힘입어 2-0으로 앞섰지만, 7회말 후속 투수들이 5실점을 허용하며 2-5로 역전패. 3연패로 몰린 한국은 4, 5차전을 잇달아 승리하며 부진을 씻어내기 시작했다. 특히 5차전에서는 부상으로 앞선 경기에서 등판 못했던 선동열이 선발로 나서 오치아이 등 일본의 간판급 타자들을 상대로 5연속 탈삼진을 기록하며 3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했고, 장종훈이 장외홈런[* 장종훈이 친 홈런의 비거리는 145m로, 나가라가와 구장 개장 이래 가장 멀리 날아간 홈런이었다. 이후 홈런이 떨어진 장소에 기념비까지 세웠을 정도로 임팩트가 엄청났다. 추후 장종훈도 이 기념비를 봤는데 일본 발음인 '호무란'으로 쓰인것이 신기했다는 후일담도 풀었다.]을 날리는 등 8-0의 완승을 기록했다. 보기 드물게 투수전으로 벌어진 마지막 6차전은 1-2로 아쉽게 패하며 6경기동안 2승 4패를 기록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